삼킬 수 없는 사탕과 같은 것 (1)

그 골목이었다. 신촌의 번잡한 큰길을 벗어나 굽이굽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어수선한 원룸촌 사이로 낡은 회색 주택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큰길가엔 술을 마시러 나온 학생들로 북적였지만, 신기하게도 몇 발자국만 안으로 들어오면 공기 자체가 바뀐 듯 고요해졌다. 이런 낯선 주거 환경에서 살아본 적 없는 해수는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처음 마주하는 풍경이 주는 생경함은 늘 그녀의 마음을 조금 들뜨게 만들었다.

지성을 따라 들어간 집 안은 겉모습과 전혀 딴판이었다. 그가 직접 칠했다는 겨자색 벽면이 거실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고, 녹색의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무채색의 건물 외관과는 대조적인, 그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나 빨리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가봐야 해. 너 안 나갈 거야? 나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지성의 물음에 체 게바라에게 머물던 시선을 떼며 해수가 대답했다.

“응, 나 여기 있을게. 엄마한테 전화도 해야 하고, 계절학기 과제도 오늘까지는 제출해야 하거든. 노트북으로 작업 좀 하고 있을게.”

해수는 책상 의자에 앉아 서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공 서적과 대학원 교재, 빛바랜 소설책과 수업 프린트물들이 벽면을 어지럽게 채우고 있었다. 그 무질서한 틈에서 해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두툼한 해부학 책이었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자 가공되지 않은 인간의 장기들이 사진 속에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으…. 의대생들은 이런 걸 매일 직접 보겠지.’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기괴하면서도 묘하게 눈을 뗄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이윽고 해수는 시선을 돌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싸이월드에나 들어가 볼까 싶어 웹사이트에 접속하자, 지성의 계정이 그대로 로그인된 페이지가 나타났다. 해수는 지성이 샤워중인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쪽으로 힐끗 고개를 돌렸다가, 그러고는 이내 대학교 포털 사이트로 마우스를 움직여 접속하였다.

“과제는 잘돼가고 있어?”

어느새 샤워를 마친 지성이 다가와 다정하게 물었다.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그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응, 책은 다 읽었고 리포트만 석 장 써서 제출하면 돼. 이제 겨우 반 장 썼는데, 언제 다 채우나 몰라.”

“주제가 뭔데?”

“엠마 보바리가 진정으로 갈구했던 게 운명적인 사랑이었나, 아니면 화려한 부르주아의 소유물이었나, 그런 거.”

지성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오호, 재밌는데? 다 쓰고 나도 좀 보여줘.”

그는 짧은 격려를 남기고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슈트 케이스를 열었다. 늘 편안한 티셔츠 차림만 봐왔던 혜수에게, 거울 앞에서 흰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짙은 색 재킷을 걸치는 지성의 모습은 생경했다. 겨자색 벽지와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가득한 이 비현실적인 방 안에서, 정갈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어딘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다.

지성은 손목시계를 차며 현관으로 향했다.

“나 진짜 늦겠다. 나 없는 동안 내 침대에서 좀 자도 되고, 배고프면 냉장고에 있는 거 꺼내 먹어. ”

그가 현관문을 열자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잠시 거실로 밀려 들어왔다.

“갔다 올게.”

짧은 인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도어락이 맞물리는 기계적인 소음이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해수는 다시 혼자가 된 방 안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놓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잠시 쉬어갈 겸, 해수는 다시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 위엔 지성의 싸이월드 계정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로그아웃 버튼 위로 마우스를 가져갔다가, 이내 손가락은 클릭 대신 지성의 미니홈피 메인을 눌렀다.

미니홈피는 지성의 취향을 증명하는 사진과 게시물들로 빼곡했다. 해수는 홀린 듯 다이어리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햄버거 맛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정확히 섭씨 65도의 온기를 사수한 패티의 심부, 그 오차 없는 1mm의 중심점에서 폭발한다. 치아가 패티 표면의 탄화된 단백질 결계를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파쇄하는 순간, 근섬유 사이에 유폐되어 있던 유리 아미노산과 이노신산은 육즙이라는 액체 전차를 타고 구강이라는 밀폐된 공간으로 비산한다. 이를 단지 ‘짠맛’이라 규정짓는 행위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가청 주파수 내의 무미건조한 ‘공기의 떨림’이라 폄하하는 것과 다름없는 지적 태만이다.

그것은 고단백을 향해 수만 년간 진화해온 인류의 유전적 탐욕이 미뢰 위에서 터뜨리는 집요한 환희다. 대지의 초원을 저작하던 생명력이 그릴의 고온 속에서 분자 단위로 재구성되어, 비로소 ‘맛의 정수’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로 승화되어 바치는 강박적인 헌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저작의 과정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혀라는 정교한 감각 기관 위에서 원초적인 생존 본능과 탐미적인 지적 유희가 1마이크로미터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은 채 격돌하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도 정밀한 인문학적 전장이다.


“진짜 글 쓰는 거 변태 같아….”

지성 특유의 유머와 사소한 것 하나에도 편집증적으로 매달려 구체화하는 그 문장력에 해수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괴짜 같은 면에 끌리는 자신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서 더 그를 알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를 알게 된 건 한 철학 모임 때문이었다.

방학을 앞두고 대학생 커뮤니티를 뒤지던 해수의 눈에 ‘철학 모임을 모집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들어왔다. 평소 철학과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해수는 가벼운 흥미로 게시글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OO대 의학전문대학원 1학년 김지성입니다. 함께 대화 나눌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거창한 지식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이나 삶의 이면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보를 외우는 스터디보다는 술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임을 지향합니다.

다만 모임의 질서와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만 대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사적인 질문은 삼가 주셨으면 하고….


‘내가 원하던 스타일인데? 주인장 얼굴이나 확인해야겠다.’

해수는 작성자의 미니홈피에 접속했다. 사진 속 지성은 검고 마른 몸에 턱의 각이 선명한, 다소 고집스러운 인상이었다. 스물다섯인데도 애어른 같은 느낌이었고, 표정에서는 약간의 거만함도 읽혔다.

그가 쓴 게시물들도 훑어보았다. 사소한 것 하나를 붙잡고 구체적으로 늘어놓는 글솜씨가 꽤 괴짜스러웠다. 그런데 그 묘한 집요함이 해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정도로 독특한 사람이라면 자신과 대화가 잘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와 신분까지 밝혔으니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싶어, 혜수는 곧장 가입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수학과 지혜, 경영학과 민경, 경제학과 정철, 심리학과 해수, 그리고 모집자 지성까지 다섯 명의 인원이 모였다. 전공도 성격도 제각각이었지만, 지성이 정해둔 ‘사생활 질문 금지’나 ‘예의 준수’ 같은 엄격한 규칙 덕분인지 모임은 묘한 질서를 유지하며 굴러갔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몇 번의 술자리로 씻겨 나갔고, 대화의 주제는 인간의 본능에서부터 현대인의 고독까지 제법 진지하게 이어지곤 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누군가 제안한 MT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장소는 강화도의 어느 한적한 펜션으로 정해졌다. 다들 들뜬 마음으로 날짜를 맞추고 단체 채팅방에서 장을 볼 목록을 나누던 어느 날 오후였다.

해수의 핸드폰에 단체 방이 아닌 개인 메시지 알림이 떴다. 지성이었다.

[바쁘신가요?]

평소 모임 공지 외에는 사적인 연락이 없던 터라 해수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메시지는 더 의외였다.

[이번 MT 장소 말인데, 생각보다 가는 길이 복잡해 보이더라고요. 혹시 시간 괜찮으면 이번 주말에 미리 한번 가볼래요? 가서 펜션 상태도 보고, 근처에 괜찮은 식당도 좀 알아둘 겸 해서요.]

답사라는 명분은 명확했다. 하지만 다섯 명이나 되는 인원 중 왜 하필 자신에게 물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지성답게 군더더기 없는 말투였지만, 해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행정적인 답사가 아니었다.

지성의 성격상 이런 제안을 하기까지 몇 번은 메시지를 썼다 지웠을 모습이 그려져 해수는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답사라는 핑계를 댄, 지성의 서툴고도 분명한 첫 데이트 신청이었다.


해수는 잠시 과거 회상에 잠겼다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남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건 실례라는 죄책감이 들었으나, 한 번 시작된 호기심은 멈출 줄 몰랐다. 혜수는 자석에 이끌리듯 게시판 폴더를 하나하나 뒤적였다. 그러다 낯선 폴더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비공개 게시판?’

자물쇠가 채워진 아이콘이 묘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혜수의 손가락이 머리보다 먼저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면이 바뀌며 나타난 게시물의 제목이 해수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영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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